문장의 제국

    정치인 이회창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까이서 직접 본 건 대학교 2학년이던 1995년의 일이다.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그는 아마도 ‘리더십’을 주제로 모교에서 특강을 가졌던 것 같다. 93년 말 감사원장에서 총리로 수직상승한 이회창이 이듬해 김영삼 대통령과의 갈등 끝에 사표를 던진 건 당시만 해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80년대 대법관 시절부터 그에게 붙어다닌 ‘대쪽’ 이미지가 한층 공고해진 게 바로 이때다. 돌이켜보면 95년만 해도 이회창은 야당의 영입 대상 ‘0순위’였다.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김영삼과 그가 이끄는 민자당(현 한나라당)에 대적할 만한 정치인이 도무지 없다고 여겨지던 시절 ‘대쪽’은 아주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회창은 김영삼의 후계자가 되는 길을 택해 많은 이를 놀라게 하고 또 실망시켰지만….


    오늘날 ‘정치인 이회창’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나 ‘법조인 이회창’, 특히 ‘대법관 이회창’은 여전히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사법부 최고위직을 지낸 이들 가운데 가장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회창이 93년 김영삼 정부의 권유를 받고 사법부에서 행정부로 자리를 옮긴 게 애석하게 느껴진다. 그가 감사원장 자리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대법관으로 남았다면 훗날 대법원장 또는 헌법재판소장에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이회창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대신 대법원장이 됐다면 한국 현대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는 가까운 기자들에게 “대법원장이 꼭 한 번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법조인 시절 이회창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가 뭐래도 소수의견, 그리고 사법적극주의다. 그는 계엄법 사건, 국가모독죄 사건처럼 권위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형사사건 재판에서 피고인 권리를 옹호하는 용기있는 소수의견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81년 대법관에 오른 그가 5년 임기를 마친 86년 정년이 아직 멀었음에도 대법관에 재임명되지 못한 이유가 전두환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이란 건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대법원을 떠난 이회창은 민주화 염원이 무르익던 87년 3월 서울대 법대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갖는데 그 주제가 바로 사법적극주의다. 이로부터 꼭 22년 뒤인 2009년 5월12일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이회창이 행한 연설을 통해 그가 그토록 강조한 사법적극주의가 도대체 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법의 해석 적용에 있어 법률 규정대로 충실하게 해석·적용하려는 소극적 자세가 있고, 단순한 자구 해석을 넘어 법의 이념인 정의 실현을 위해 창조적인 해석·적용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세가 있다. 후자가 이른바 사법적극주의다. 나는 법관으로 있을때 사법적극주의자였다. 사법소극주의자들은 ‘사법적극주의는 사법이 그 한계를 넘어 입법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법관은 자신의 일이 법률 규정의 문언 그대로 충실히 해석·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정의 관념에 맞게 법문을 확대 또는 축소 해석해 정의를 실현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법관으로서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87년 이회창의 사법적극주의 주장은 젊은 법학도들 가슴에 그야말로 불을 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회창이 사법적극주의를 거론했다.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한 미디어법을 놓고 헌법재판소가 “법률 개정 절차에 문제가 있지만, 개정된 법률 자체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린 직후다. 그는 10월30일 기자회견에서 “헌재가 절차의 위법성을 확정하고서도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발뺌한다면 헌재는 왜 애써 위법 판단을 했고, 또 헌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고 일갈했다. “헌재가 이렇게 도망가선 안 된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촉구에서 ‘사법적극주의자 이회창’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일단 헌재 결정이 선고된 이상 이를 존중해야 한다. 헌재 결정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거부하는 건 공당(公黨)의 자세가 아니다”는 말로 한 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했지만….


    참고로 요즘 판사들 사이엔 이회창의 바람과 달리 ‘사법소극주의’가 대세라고 한다. 한 중견 법관은 “판사들 대부분 법을 ‘창조’하기보다는 있는 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게 도리에 맞다고 여긴다. 사법적극주의를 지지하는 법관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이번 헌재 결정에 대해서도 판사들은 별 이의가 없다”고 전했다. 사실 법관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사법적극주의자를 자처해도 어차피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사건이 접수돼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사건을 제기하는 건 검사나 변호사 몫이지 법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득 “정치, 사회를 바꾸고 싶으면 판사 대신 시민운동가를 택하라”던 어느 전직 대법관의 조언이 떠오른다. 법률가들에게 사법적극주의가 옳으냐, 아니면 사법소극주의가 옳으냐는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難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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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에서 진보·보수의 양쪽 끝에 각각 서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박시환(왼쪽)·신영철(오른쪽) 대법관이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의원의 의원직 박탈 여부를 놓고 한바탕 격돌한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끕니다.


    대법원에 따르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문 전 의원 상고심 사건은 당초 대법원 3부(주심 신영철 대법관)에 배당됐습니다. 대법원 3부에는 신 대법관 말고도 박시환, 안대희, 차한성 3인의 대법관이 더 있죠.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은 통상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부(部)에서 심리해 판결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만 이는 대법관 4명이 합의 끝에 만장일치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죠. 합의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려 도저히 결론 도출이 불가능할 것 같으면 사건은 부를 떠나 전원합의체로 넘겨집니다.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3인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는 다수결로 판결을 확정하죠.


    문 전 의원 사건의 경우 검찰이 공소장에 범죄사실 말고 판사한테 유죄의 심증을 줄 수 있는 사항을 기재한 게 법률에 어긋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형사소송법과 그 시행규칙에 따르면 공소장에는 사건에 관해 법원이 예단을 갖게 할 수 있는 서류 등 물건을 첨부하거나 그런 내용을 인용할 수 없게 돼있죠. 이를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 원칙이라고 부릅니다.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 원칙을 어겼다”는 문 전 의원 측 주장에 주심인 신 대법관은 “재판이 진행되고 난 다음 법관의 심증 형성이 이뤄진 단계에서는 공소장 일본주의 위반을 주장할 수 없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반면 같은 부의 박 대법관은 “공소장 일본주의에 위배된 경우 시기에 상관 없이 공소를 기각해야 하므로 원심을 파기환송해야 한다”고 맞섰죠.


    둘의 견해차가 너무 커 합의가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사건은 대법원 3부를 떠났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0월22일 문 전 대표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문 전 의원의 ‘금배지’를 박탈했습니다. 신 대법관 등 9명은 원심 확정에, 박 대법관 등 4명은 파기환송에 각각 표를 던졌습니다. 김영란, 김지형, 전수안 3인의 대법관이 박 대법관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소수의견에 그쳤죠.


    다수의견을 주도한 신 대법관은 올해 5월 박 대법관 때문에 겪은 ‘수모’를 톡톡히 갚아준 셈이 됐습니다. 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시위 관련자 재판을 맡은 단독판사들에게 “재판을 빨리 하라”는 압력성 이메일을 보낸 것 때문에 대법원장 경고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던 시절 박 대법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신 대법관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죠.


    1953년생 동갑에 서울대 법대 72학번 동기이기도 박·신 두 대법관은 각각 ‘재야’와 ‘정통법관’의 시각을 대변해 대법원 내 대표적 ‘라이벌’로 불립니다. 박 대법관이 한마디로 ‘운동권’의 길을 걸어왔다면, 신영철 대법관은 늘 법원 내 주류 세력에 속했던 ‘엘리트’죠. 사법시험은 신 대법관이 3년 먼저 붙었지만, 대법원 입성은 박 대법관이 3년 가량 더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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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옥외집회 금지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법원마다 다른 판결로 국민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보도한 세계일보 2009년 10월29일자 9면.

    “해당 법률 조항이 위헌이란 사실이 확인된 만큼 유죄라고 판단할 수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이제식 판사가 10월28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밝힌 이유입니다. 야간 옥외집회를 사실상 금지한 집시법 10조에 헌법재판소가 “헌법에 위반되지만, 2010년 6월까지는 효력을 인정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놓은 뒤 하급심 법원에서 처음 나온 무죄 판결이죠.


    헌재 결정이 내려진 뒤 그동안 대구지법, 울산지법, 서울북부지법 등은 관련 사건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단보다 “2010년 6월까지 효력을 인정한다”는 결정에 더 무게를 둔 것이죠. 하지만 이 판사는 후자보자 전자를 중시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 보호와 직결된 형사처벌 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게 명백한 상황에서 이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젊은 법관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판사는 “2010년 6월까지 효력을 인정한다”는 헌재 결정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셈이 됐지만 이게 이 판사 또는 법원의 문제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돌아보면 헌재가 집시법 10조에 위헌 대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을 1년 동안 계속 적용하라고 하는 건 헌정국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어정쩡한 결론을 낼 바에야 차라리 선고를 1년 뒤로 미루는 게 나았습니다.


    헌재는 위헌 대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근거로 새 법률이 만들어질 때까지 벌어질 혼란을 들었으나,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한 판사는 “위헌 결정이 나면 법원은 해당 법률 조항이 없어진 점을 근거로 관련 사건에서 무죄 선고를 내리면 되고, 검찰은 현재 수사 중인 사건에서 전부 불기소 처분을 하면 되는데 무슨 혼란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헌재 혼자 이것저것 고민하느라고 끙끙 앓다가 수준 이하의 결과를 내놓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선고 전에 헌재 내부에서도 이런 지적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조대현 재판관은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 등 실무에서 겪을 어려움을 예견하고 “당장 적용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으나 동료 재판관들에 의해 무시당했죠. 제도가 그렇게 돼있어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재판관 9명 중 5명이 위헌, 2명이 헌법불합치를 주장한 사안에서 헌법불합치가 최종 결론으로 채택된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위헌이면 위헌이고 합헌이면 합헌이지 왜 헌법불합치, 한정위헌 같은 변형결정을 자꾸 해 논란을 일으키나. 20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를 해도 도무지 듣질 않아.” 1988∼94년 초대 헌재 재판관을 지낸 변정수 변호사의 탄식입니다. 헌재는 변형결정 효력 인정을 놓고 대법원과 다툴 게 아니라 지금 심리하는 사건에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는 일에 더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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