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인 이회창’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나 ‘법조인 이회창’, 특히 ‘대법관 이회창’은 여전히 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사법부 최고위직을 지낸 이들 가운데 가장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회창이 93년 김영삼 정부의 권유를 받고 사법부에서 행정부로 자리를 옮긴 게 애석하게 느껴진다. 그가 감사원장 자리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대법관으로 남았다면 훗날 대법원장 또는 헌법재판소장에 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이회창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대신 대법원장이 됐다면 한국 현대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는 가까운 기자들에게 “대법원장이 꼭 한 번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법조인 시절 이회창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가 뭐래도 소수의견, 그리고 사법적극주의다. 그는 계엄법 사건, 국가모독죄 사건처럼 권위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형사사건 재판에서 피고인 권리를 옹호하는 용기있는 소수의견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81년 대법관에 오른 그가 5년 임기를 마친 86년 정년이 아직 멀었음에도 대법관에 재임명되지 못한 이유가 전두환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이란 건 오늘날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대법원을 떠난 이회창은 민주화 염원이 무르익던 87년 3월 서울대 법대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갖는데 그 주제가 바로 사법적극주의다. 이로부터 꼭 22년 뒤인 2009년 5월12일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이회창이 행한 연설을 통해 그가 그토록 강조한 사법적극주의가 도대체 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법의 해석 적용에 있어 법률 규정대로 충실하게 해석·적용하려는 소극적 자세가 있고, 단순한 자구 해석을 넘어 법의 이념인 정의 실현을 위해 창조적인 해석·적용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 자세가 있다. 후자가 이른바 사법적극주의다. 나는 법관으로 있을때 사법적극주의자였다. 사법소극주의자들은 ‘사법적극주의는 사법이 그 한계를 넘어 입법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법관은 자신의 일이 법률 규정의 문언 그대로 충실히 해석·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정의 관념에 맞게 법문을 확대 또는 축소 해석해 정의를 실현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법관으로서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87년 이회창의 사법적극주의 주장은 젊은 법학도들 가슴에 그야말로 불을 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회창이 사법적극주의를 거론했다.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한 미디어법을 놓고 헌법재판소가 “법률 개정 절차에 문제가 있지만, 개정된 법률 자체의 효력은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린 직후다. 그는 10월30일 기자회견에서 “헌재가 절차의 위법성을 확정하고서도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발뺌한다면 헌재는 왜 애써 위법 판단을 했고, 또 헌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고 일갈했다. “헌재가 이렇게 도망가선 안 된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촉구에서 ‘사법적극주의자 이회창’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일단 헌재 결정이 선고된 이상 이를 존중해야 한다. 헌재 결정이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거부하는 건 공당(公黨)의 자세가 아니다”는 말로 한 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했지만….
참고로 요즘 판사들 사이엔 이회창의 바람과 달리 ‘사법소극주의’가 대세라고 한다. 한 중견 법관은 “판사들 대부분 법을 ‘창조’하기보다는 있는 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게 도리에 맞다고 여긴다. 사법적극주의를 지지하는 법관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이번 헌재 결정에 대해서도 판사들은 별 이의가 없다”고 전했다. 사실 법관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사법적극주의자를 자처해도 어차피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사건이 접수돼야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판단을 내릴 수 있는데, 사건을 제기하는 건 검사나 변호사 몫이지 법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득 “정치, 사회를 바꾸고 싶으면 판사 대신 시민운동가를 택하라”던 어느 전직 대법관의 조언이 떠오른다. 법률가들에게 사법적극주의가 옳으냐, 아니면 사법소극주의가 옳으냐는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난제(難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