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꽃이라고 불리는 가장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가장 비(非)전문가가 들어오더니, 얼마가 지나자 법원의 반발이 별것 아니라고 여겨졌는지 다른 한 사람의 비전문가가 추가되어졌다.”
‘6월항쟁’의 열기와 6·29선언의 감동이 채 식지 않은 1988년 1월의 어느 날 <법률신문>에 실린 양삼승(사진) 서울고법 판사(現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의 기고문입니다. ‘사법권은 계속 잠식당해야 할 것인가’란 자못 도발적인 제목을 단 이 글은 당시의 법원·검찰 관계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려 법조계에 파문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죠. 양 판사의 지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왜 대법원에 검찰 출신이 2명이나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제기로 집약됩니다.
양삼승 판사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81년 전두환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5공화국 정권이 출범한 뒤 대법원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대 사건이 벌어졌죠. 당시 법무부 차관(고검장급)이던 정태균씨와 서울지검장(검사장급)이던 강우영씨가 각각 대법원판사(대법관의 옛 명칭)로 영입된 것입니다. 3공화국 이래 대법관들 가운데 1명을 검찰 출신 인사 중에서 뽑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긴 했으나 그 숫자는 어디까지나 1석이었죠. 그런데 5공 정권이 다짜고짜 이를 두 배로 늘렸으니 일선 법관들로선 당혹스러움과 함께 모욕감을 느낄 법도 했습니다.
▲ 3공화국 초기까지만 해도 검찰과 법원 간엔 빈번한 인사 교류가 있었다. 하지만 대법관 가운데 1명을 검찰의 검사장급 이상 간부 중에서 충원하는 관행이 정식으로 성립한 것은 1964년의 일이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철권통치에 단단히 주눅이 든 판사들은 이렇다할 반항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대법관 중 2명을 검찰 출신으로 채우는 행태는 다음 인사 때에도 반복됐습니다. 정·강씨가 5년의 임기를 마친 1986년 이들의 후임으로 이명희 서울고검장과 이준승 광주고검장이 나란히 대법관에 지명된 것이죠. 이대로 가면 ‘대법관 2석 = 검찰 몫’이란 논리가 아예 ‘관습헌법’으로 굳어질 판이었습니다. 마침 이들의 임기 도중인 1988년 5공 헌법이 폐기되고 6공 헌법이 발효함에 따라 대법원 진용의 개편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양삼승 판사는 이런 시대적 맥락 속에서 과감히 검찰 출신 인사의 대법관 임명 관행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죠.
물론 3공화국 초기까지만 해도 검찰과 법원 간엔 빈번한 인사 교류가 있었습니다. 광복 이전의 사법제도는 법원 산하에 ‘검사국’이 있어 검찰 업무를 맡는 구조였죠. 검찰·법원이 지금처럼 떨어지지 않고 ‘한 몸’이었던 탓에 판·검사도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법원과 검찰이 비로소 분리됐으나 판·검사는 한동안 그렇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어느 날 법관으로 변신하고, 판사가 법무부·검찰의 간부가 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시절이었죠. 민복기 전 대법원장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일제시대에 판사로 출발했던 그는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을 지냈습니다. 그런 그가 1961년엔 대법관이 됐고 다시 법무부 장관(1963~66년 재임)을 거쳐 68년 대법원장에 임명, 78년까지 10년간 재직했습니다. 2대 검찰총장인 한격만 선생과 4대 검찰총장 김익진 선생 역시 대법관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 왼쪽부터 강우영·김주한·지창권 전 대법관과 강신욱 현 대법관. 검찰 고위간부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냈거나 현재 역임 중인 인사들이다.
이런 법원·검찰 간의 인사 교류는 법조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950~60년대의 실정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검사 출신이 대법관에 임명되더라도 그냥 ‘법조계 원로’ 자격이었지 ‘검찰 몫’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1964년 대검찰청 차장(고검장급)이던 주운화씨가 대법원판사에 임명된 것은 그 전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주씨는 법원과 검찰 간의 합의에 따라 검찰의 ‘대표선수’ 자격으로 대법원에 입성했습니다. 이 점에 관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죠. “1964년 법무장관 민복기와 검찰총장 신직수, 이 환상의 콤비는 ‘대법원이 전체 법조계를 대표하기 위해서 대법원 판사에 검찰 출신도 들어가야 한다’는 궤변을 내세워 마침내 대검 차장 출신의 주운화 등이 검찰 대표로 대법원 판사가 되는 길을 연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관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64년 주운화 대검 차장이 대법원판사에 임명되고 75년 나길조 광주고검장이 다시 대법원판사로 영입되면서 대법원에 최소 1명 이상의 검찰 출신 인사가 포진하는 관례가 성립됐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5공화국 때는 이게 2석으로 늘어나기도 했죠. 6·29 이후 법원 내부에선 양삼승 판사 같은 소장파를 중심으로 ‘이번 기회에 검찰에서 대법관을 충원하는 관행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강력히 저항했고, 대법원 수뇌부도 이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6공의 첫 사법부 수장이었던 이일규 대법원장은 1988년 김주한 대검 감찰부장(검사장급)을 대법관에 제청했습니다. ‘검찰 몫 대법관’이 2석에서 1석으로 숫자만 줄어든 채 기어이 살아남은 것이죠. 김씨가 6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로도 법무연수원장(고검장급) 출신의 지창권 대법관(1994~2000년 재임), 서울고검장을 지낸 강신욱 대법관(2000년~현재)이 차례로 탄생했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를 구성하는 13자리 중 1석은 ‘검찰 몫’이란 게 사실상 ‘관습헌법’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 왼쪽부터 안대희 서울고검장, 이종백 부산고검장, 홍경식 법무연수원장, 김희옥 법무부 차관. ‘대법관 1석 = 검찰 몫’이란 관행이 지켜진다면 이들 중 1명이 오는 7월 퇴임하는 강신욱 대법관(前 서울고검장)의 후임으로 대법원에 입성하게 된다.
대법관 가운데 1~2명을 검찰 출신으로 채우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이 관행이 박정희 정권 때 도입돼 전두환 정권 시절 한층 강화된 점을 감안하면 선뜻 후한 점수를 주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사법부(법원) 통제를 위해 행정부(검찰) 관료를 ‘낙하산 인사’처럼 밀어 넣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당연히 제기됩니다. 검찰 출신 대법관의 ‘능력’도 검증돼야 할 과제입니다. 앞서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자리에 비전문가가 앉은 격”이란 양삼승 판사의 비판을 소개했지만, 실제로 대법원 안팎에선 ‘검찰 출신 인사는 대법관 직무를 수행하기엔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돕니다. 물론 이런 문제점들을 상쇄할 명분이 하나 있긴 합니다. 1964년 민복기 대법원장이 검찰에 ‘대법원행(行) 티켓’ 1장을 배정할 때 내세운 논리 - “대법원이 전체 법조계를 대표하려면 검찰 출신도 포함해야 한다” - 가 바로 그것이죠.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가 시대적 요구인 요즘 결코 무시하기 힘든 주장임이 틀림없습니다.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최근 “인물의 적격성을 따지기보다 ‘검찰 몫 배정’ 방식으로 고위검사를 대법관에 임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전체 대법관 중 검사 출신이 꼭 1명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검찰에 대법관 자리 하나가 자동 할당되는 방식은 곤란하다는 뜻이 담겨있죠. 이런 맥락에서 참여연대는 오는 7월 퇴임하는 강신욱 대법관(검찰 출신) 등 대법관 5명의 후임자를 추천하며 전·현직 검사를 배제한 채 현직 판사 6명과 재야 변호사 1명만 후보자 명단에 올렸습니다. 물론 현행 헌법상 대법관 후보 제청은 대법원장의 고유권한인 만큼 대법관 1석을 계속 ‘검찰 몫’으로 남겨둘지, 아니면 1988년 이후 검찰에 남은 단 한 장의 ‘대법원행(行) 티켓’마저 회수할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관 1석 = 검찰 몫’이란 관행을 그대로 수용할지 여부에 법조계의 관심이 쏠려있습니다.